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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들/책

나는 당신에게 왜 그토록 어리석은 연인이었을까요, 한강 '희랍어 시간'

과장되게 간곡한 그의 어조에 그녀는 당황했다. 가장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그녀를 이해한다는 그의 말이었다.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담담하게 알았다. 모든 것을 묵묵히 수습하는 침묵이 두 사람을 둘러싼 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요.

그녀는 펜을 집어, 탁자에 놓인 백지에 반듯한 글씨로 적었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말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특히나 극단적인 상황에, 극단적인 감정에 빠진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이해하려 노력할 수는 있겠지만, 그리고 그 사람의 심정이 이해 간다고 느낄 수는 있겠지만, 쉽게 뱉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한 마디에 불과하지만, 그 무게는 그리 가볍지 않으니까.

 

그리고 일상적으로, 또 비즈니스적으로 뱉은 '이해한다'는 말은 오히려 무력감을 강화시켰겠지. 더욱 폐쇄적이고 싶어지겠지. 맞다, 상대를 이해하는 일이라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아무리 간단해 보이는 상황이라 해도, 답이 명확해 보이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혹은 그 상대를 매우 잘 알고 있다 확신하는 상황이라도, 이미 이전에 비슷한 상황을 자주 겪어 익숙하다 하더라도, '다 안다, 다 이해한다'라는 말은 그 어떤 상황에 써도 오만이고 착각에 가까울 것이다. 그게 어쩌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솔직하게 인정한 상황보다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

 

그 오만함 앞에서, 상대는 그 어떠한 말도 꺼내고 싶지 않을 테니까. 나 자신보다 나를 더 잘 안다고 확신하는 이에게, 모든 것을 간단하고 쉬운 일로 만들어 버리는 이에게.

 

오래 전에 끓어올랐던 증오는 끓어오른 채 그 자리에 멈춰 있고, 오래 전에 부풀어 올랐던 고통은 부풀어 오른 채 더 이상 수포가 터지지 않았다.

 

아무 것도 아물지 않았다.

 

아무 것도 끝나지 않았다.

 '시간이 약이다', '이 또한 다 지나가리라.'

지금은 아무리 괴로워도, 이 시간이 영원할 것만 같고 가시지 않을 것 같아서 그 무엇도 어찌할 수가 없고, 차라리 끝내는 게 나을 것 같다 싶을 때에도 사람들은 알고 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것을. 그래서 하루하루가 그저 지나가도록 방치하는, 어떻게 보면 무책임한 방식으로라도 어떻게든 버티고, 견뎌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자기 자신도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늘 그랬듯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니, 그러기를 바라면서도, 그런 순간이 닥치면, 괴로워서 이번은 특별한 경우가 아닐까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도 가시지 않을까, 괴로워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주변 사람들이 해 줄 수 있는 말 또한 아마 저 위의 두 마디가 전부일 텐데. 그렇게 위로할 수밖테 없을 텐데. 그리고 결국 그 당사자도 그 말을 믿는 수밖에, 믿든 믿지 않든 그렇게 살아나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도, 주변 이들에게도, 그게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괴로운 감정이 찾아오는 일이면, 경험하고 싶지 않고, 지속되어서 좋은 게 없는 감정이 찾아오는 일이면, 그러나 온종일 빠져 있게 되고, 자의로 헤어나오기 힘든 일이면, 저 두 마디를 늘 썼던 것 같다. 남용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자주.

 

그런데 그게 정말, 가시지 않는 고통이고, 아물지 않는 상처고, 사그러들지 않는 감정이면, 어떡하지.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겠지만, 어쩌면 많은 부분을 늘 차지하고 갈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버틸 수 있을 만큼, 다른 것들도, 새로운 것들도 기어들 수 있을 만큼으로는 시간이 치유할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그래서 그 약이 최선이라, 최고의 위로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상투적이라 보여도, 정말 진심을 담는다면 위로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너무나 단호한 글에 무력감을 느꼈다.

 

비슷한 문제겠지, 앞의 '다 이해한다'와 '간단하다'처럼. 누군가에겐 이 세상엔, 시간이 치유할 수 없는 고통이 존재할 테니, '무슨 일이든,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견딜 만해'라는 확신은 '너는 안 겪어 봐서 모르겠지' 하는 폐쇄적인 결과를 낳을지도 모르겠구나, 싶었다.

 

그럴 때는 무슨 말을 건네야 하나.

그 어떤 말도 건네지 않는 게 나을까.

 

이를 테면 너는, 그렇게 말할 자격이 스스로에게 있다고 믿고 있었던 거지.

세상의 어떤 불행이든 스스럼없이 대해도 될 만큼 고통을 겪어 보았다고.

깊은 이야기를 터 놓을 수 있을 정도로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상대와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눌 때에는, 그 대화 소재가 아무리 깊고 접근하기 어려운 이야기라 해도 두렵지는 않았다. 그럴 때에는, 굳이 말이 필요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으니까. 눈을 오롯이 마주하고, 그저 잘 듣고 있다, 라는 신호를 보내주면 되었으니까. 그러한 진심이 잘 전해지도록,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그 상황을 경험해 보지 않은 이가, 그 이상으로 공감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섣부른 조언은, 아무리 진심을 담아 내놓은 답이라 해도, 상대에게 상처를 주거나, 성에 차지 않는 말일 수 있으니까. 그리고 설령 그런다 해도, 상대의 반응을 즉각적으로 살필 수 있기에, 그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을 취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내가 직접 대면해서 대화를 나누는 이들은 한정되어 있었기에, 그들의 이야기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으니까.

 

아마 면대면 대화를 나누는 게 두렵지 않았던 건, 마지막 이유가 가장 크겠지. 무력감은 느꼈지만, 적어도 두려움까지는 아니었던 거겠지.

 

그러나 공개적인 장소에, 내가 모르는 불특정 다수가 글을 읽을 수 있는 오픈된 공간에 글을 올리는 것은 늘 두려웠다. 철저히 내가 살아온 세상에 기반을 두고, 그러한 시선으로 펼쳐 나가는 글이, 누군가에게는 단순히 공감이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상처로 닿을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그 누구에게도 날을 세우지 않은 글을 쓰려고 한 발짝 한 발짝 물러나다 보면 글은 점점 더 모호해져 갔고,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그 의미를 이해하기 쉽지 않게 되어 버렸다.

 

이 구절과는 반대로, 나는 내가 세상의 불행에 대해, 고통에 대해 확신 따위가 없었기 때문에. 내가 그 동안 살면서 느꼈던, 겪었던 감정들은 세상에서 고통이라 부르는 것들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래서 살면서 그 어떤 고통도, 불행도, 가볍게 함부로 스스럼없이 대할 수가 없었다. 늘, 그 어떤 말도 건네기 두렵다, 생각했을 뿐. 기껏 꺼낼 때에는, 조심스러운 말로 한참을 돌아가거나 얼버무려서 상대가 다시금 묻게끔 만들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