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로 철현을 켜면 슬프거나 기이하거나 새된 소리가 나는 것처럼, 이 단어들로 심장을 문지르면 어떤 문장들이건 흘러 나올 것이다. 그 문장들 사이에 흰 거즈를 덮고 숨어도 괜찮은 걸까.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 것들을 건넬게.
더 이상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게.
이 삶을 당신에게 건네어도 괜찮을지.
'흰'이라는 단어가 나에게 연상케 하는 것은 순수함이다. 그 어느 것도 아직 침범하지 못한, 상처받지 않은, 더럽혀지지 않은, 누구나 깊은 곳 어딘가에는 감추고 있을, 가장 내면의 여린 살. 그 내면의 '흰 것'을 열어 보인다는 것, 건넨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오랫동안 고이 간직해온 나의 세계가 깨지고 파괴당하고 물들고 더럽혀질까, 하는 두려움. 그 어느 것이 파괴당해도, 무시당해도, 경멸당해도 견딜 수 있었지만 그 '흰 것'이 더럽혀진다 생각하면, 와르르 무너질까 두려워 차마 내보이지도, 건넬 수도 없었던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흰 것을 건넨다는 것. 더럽혀질 수 있음을 인지하더라도 그 흰 것을 건넨다는 것. 당신에 의해 더럽혀진다기보다는, 당신에게 닿는 그 과정에 있어 더럽혀질 수 있다 해도, 그것을 감수하면서 당신에게 '흰 것'을 건네겠다는 것. 결코 가벼운 의미가 아니기에,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었을 것이다. 그것을 내보이는 게, 내 자신에게도 큰 의미이지만 나의 '흰 것'이 당신에게 가 닿을 때, 그게 당신에게는 또 어떠한 의미로 가 닿을지 알 수 없는 일이므로. 그게 또 당신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당신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과연, 당신이 괜찮을지. 그 또한 나에게 두려운 문제일 것이므로.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당신에게 '흰 것'을, 내 온전한 세계를, 내 삶을 건네겠다,
그런 의미로 다가 왔던 글.
물과 물이 만나는 경계에 서서 마치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파도의 움직임을 지켜 보는 동안 (그러나 실은 영원하지 않다- 지구도 태양계도 언젠가 사라지니까,) 우리 삶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또렷하게 만져졌다.
부서지는 순간마다 파도는 눈부시게 희다.
먼 바다의 잔잔한 물살은 무수한 물고기들의 비늘 같다. 수천수만의 반작임이 거기 있다. 수천수만의 뒤척임이 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영원하지 않다.)
아무 것도 영원하지 않음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이 영원할 것처럼 사는 아이러니는 상당히 아름답다.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이마를, 눈썹을, 뺨을 물큰하게 적시는 진눈깨비.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 사실을 기억하며 걸을 때, 안간힘을 다해 움켜쥐어온 모든 게 기어이 사라지리란 걸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것.
얼음도 아니고 물도 아닌 것.
눈을 감아도 떠도, 걸음을 멈춰도 더 빨리 해도 눈썹을 적시는,
물큰하게 이마를 적시는 진눈깨비.
눈과 비는 둘 다 좋아하면서, 그 애매한 경계에 있는 진눈깨비는 싫어하는데, 그 애매한 것이 와닿는 느낌이, 그 애매한 것을 밟을 때의 느낌이 찝찝해서 싫어하는데, 어쩌면 그렇게 명확하지만은 않은, 삶과 닮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선과 악이 명확히 갈리지 않듯이, 좋고 싫음이 명확히 갈리지 않듯이, 옳고 그름이 명확히 갈리지 않듯이. 정말 원치 않았던 순간에 평생토록 원했던 기회가 찾아오듯이, 얻기 위해 몸부림쳤던 것을 얻고 나니 허망하듯이, 혹은 그리 얻어낸 것이 허망하게 사라져 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듯이.
될 대로 되어라, 흘러갈 대로 흘러가라.
지나갈 것은 지나가고, 올 것은 흘러와라.
어찌 한다 해도, 결국은 눈썹을 적시는, 점점, 차차, 이마까지 적셔 오는 진눈깨비처럼.
결국엔 인생 도한 그리 흘러가는 것일까. 그리 지나가는 것일까.
새로 빨아 바싹 말린 흰 베갯잇과 이불보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거기 그녀의 맨 살이 닿을 때, 순면의 흰 천이 무슨 말을 건네는 것 같다. 당신은 귀한 사람이라고. 당신의 잠은 깨끗하고 당신이 살아 있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잠과 생시 사이에서 바스락거리는 순면의 침대보에 맨살이 닿을 때 그녀는 그렇게 이상한 위로를 받는다.
당신이 어떤 하루를 보내고 왔든,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고 무슨 말을 듣고 무슨 대접을 받았든, 당신은 '귀한 사람'. 그 존재 자체가 소중한 사람.
이불이 고급 이불이든, 아니면 싸구려 이불이든, 깨끗하고 뽀송뽀송한 이불이든, 눅눅하고 더러운 이불이든, 이 이불 속에 들어와 모든 것을 다 놓아 버리고 편안해질 권리가, 가치가 있는 사람.
편안한 잠, 깨끗한 잠을 누릴 권리를 보장받아야만 하는, 그런 귀한 사람.
201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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