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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아이스크림과 연희동

 이사를 했다. 다시 기숙사에 돌아왔고, 기숙사에 오래 산 덕분인지 기숙사에 적응하는 데에는 며칠 걸리지 않았다. 며칠도 아니고, 단 하루 만에 적응해 버린 것 같다. 룸메도 좋았고, 기숙사 시설도 좋았고, 기숙사에서 학교 걸어가는 길도 좋았고,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도 좋았다. 모든 게 완벽했다. 너무 완벽해서 공부 대신 다른 것들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게 문제였지만. 그래도 조금은 행복을 즐겨도 괜찮잖아, 그렇게 생각했다.

 

 오늘은 오랜만에 저녁이 빈 날이었다. 저녁이 빈 데에는 '시험 기간이니까 공부해라'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을 알았지만, 오랜만에 빈 저녁인데 공부 대신 조금은 딴짓을 채워넣어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날씨도 좋은데 오랜만에 연희동을 산책해야지 싶어서 연희동을 걸었다. 밥을 후딱 먹고 너무너무 배부르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행복의 정점은 아이스크림에 있지, 생각하면서 굳이굳이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언제부터 슈퍼에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찰옥수수 아이스크림을 샀고, 첫 입을 베어물자마자 너무 딱딱해서 정말 오래된 아이스크림이구나, 실감했다. 그래도 뭐 어때, 맛만 있으면 된 거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오래오래 산책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동시에 산책하느니 그 시간에 침대에 좀 더 누워 있고 싶어, 생각했다. 그 시간을 아껴 공부하자가 아니라 그 시간을 아껴 침대에 누워 있자, 이런 생각을 하다니. 어떻게든 휴식 시간을 보장해야 한다는 나의 의지 참 대단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행복했다. 행복을 자각하는 순간들이 참 좋았다. 앞으로 시간이 많이 흘러도, 나는 연희동에 올 때마다 그 행복을 자각했던 순간들을 떠올리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 동네를 걸으면서 나는 아이스크림을 수없이 먹었었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이 조용한 동네를 느릿느릿 걷던 순간들을 사랑했었지. 적당한 바람, 적당히 조용하고 적당히 아기자기한 동네. 그 동네에서 어디 가서 무슨 아이스크림을 먹을까 행복한 고민을 하다가 결국에는 하나를 골라 입에 물고 이 동네를 걸었었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그 작은 행복을 사랑했던 순간들을, 시절들을 분명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있을 거야. 그리고 시간이 아주 오래 흐른 후에도, 똑같이 이 동네에서 비슷한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면서 똑같이 행복을 자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시간이 많이 흘러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산책하는 순간에 행복을 자각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원대한 꿈은 이제 필요없었다. 요즘은 성공한 사람들을, 나름대로 자신의 인생을 잘 꾸려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그 사람들을 보면서도 원대한 꿈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에,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산책하는 저녁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 그 순간들에 행복을 자각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비싼 아이스크림일 필요도 없었고, 1000원 남짓한 아이스크림이면 되었다. 대신에 동네는 좀 조용하고 평화로워야겠다. 연희동은 그 행복의 조건에 딱 알맞은 동네였다. 행복을 자각하기에 알맞은 동네이지만, 연희동에 살기 위해서는 돈이 많이 필요하네. 조용하고 평화로운 동네가 곧 살기 좋은 동네니까, 그런 동네에서 살기 위해서는 돈이 많이 필요하겠구나. 별스럽지 않은 행복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행복을 일상적으로 영위하려면 또 결국엔 돈이 많이 필요한 걸까. 결국 결론은 돈인가. 돈을 아주 많이 벌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을 거라는 결론을 내리고 싶었는데, 그 예시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걷는 저녁을 들고 싶었는데 생각해 보면 결국 그 저녁을 위해서도 많은 돈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행복해. 계피의 목소리를 들으며 누워서 일기를 쓰는 저녁. 사랑하는 계피. 사랑하는 목소리들, 익숙한 목소리들이 있어 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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