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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들/영화

2018 2월까지 보았던 영화 정리 01

1. 패딩턴 180102

 

STILLCUT

 

 

 역시 집에 오니 거실 소파에 누워서 TV를 시청하는 재미를 버릴 수가 없다. 한때 예능 PD를 꿈꿨던 사람으로 (물론 핑계다) 11시대의 예능을 시청하는 것은 여전히 즐거운 일. 매일 혼자서 노트북으로 넷플릭스를 보다가, 따뜻한 온수 매트 위에서 온 가족이 함께 수다 떨면서 TV를 보는 건 또다른 즐거움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다 핑계고, 그냥 게으른 기분이 좋았다. 마음에 쏙 드는 콘텐츠를 봐야겠다는 강박이 있어서 한참의 서칭 끝에 그 날 볼 콘텐츠를 결정하는 편인데, TV는 그렇지 않으니까. 뭐하는지도 모르고 TV를 켜서 한참을 채널을 왔다갔다거렸고, 평소엔 다큐멘터리는 관심도 없으면서 여행 다큐나 사람 사는 이야기를 다룬 다큐를 보기도 하고. 방학 때는 넷플릭스를 열심히 봐야겠다 생각했지만, 사실상은 TV를 열심히 봤다. 맘껏 게으른 기분을 즐겼다.
 
 어제는 그러다가 신년 특선 영화를 봤다. 더빙된 영화를 좋아하지는 않는 편이지만, 일단 볼 만한 프로가 없었고 눈앞에 보이는 말하는 곰이 너무나 귀여웠다. 뭔 내용인가 찾아보니 1초마다 사고 치는 곰 이야기란다. 사랑스러운 코미디겠구나,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랑스러웠다. 뻔한 스토리라인이지만 진행되는 과정 하나하나 모든 게 사랑스럽다. 패딩턴뿐만 아니라, 과장된 특성이 살아 있는 주변 인물들도 사랑스럽고. 누군가를 다치게 하는 웃음이 아닌, 마음이 따뜻해지는 웃음이 영화 곳곳에서 묻어난다. 패딩턴을 위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움직이다니, 뻔한 결론이라 해도 참 마음 따뜻해지는 대장정 아닌가 싶더라. 어린이가 봐도 재미있는 영화겠지만, 나이 먹고 봐도 충분히 사랑스러운 영화다. 19곰 테드를 연상하게 하는 영화였는데, 결은 다른 웃음이 터져나오던 영화였다. 소품도 예쁘고 여러모로 신년과 잘 어울리는 영화였던 듯.

 

 

2.  1987   - 18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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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변화의 힘을 믿을 수 있는 세상을 꿈꿨다. 내가 해 봤자 뭐가 바뀌겠어, 하고 지레 포기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작은 변화의 힘을 믿고,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그러한 변화를 시도해 볼 용기를 가질 수 있는 세상. 그렇게 다양한 작은 목소리가 존재하고, 그 목소리들이 존중 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랐다. 어느 순간부터 그런 이상적인 세상에 대한 꿈은 잊고 살았던 것 같다. 개인적인 삶에 대한 이상도 흐릿해진 마당에, 이상적인 세상이 또렷할 리가 없으니까.

 


 1987은 다시금 이상에 대해 생각하게 했던 영화였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이후의 일렁인 마음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다른 긴 말 대신, 작은 변화의 힘을 믿는다고 말하고 싶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목소리, 그 목소리들이 세상에 나왔을 때 갖는 힘을 믿는다. 나와 같은 목소리를 품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이 있구나, 나 혼자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같은 꿈을 꾸고 있었구나.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 공간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느낄 수 있었던 위로와 에너지를 기억한다. 함께 있으니까 무력하지 않아. 무력을 넘어서, 희망을 꿈꿀 수 있게 된 순간을 기억해.
 너무나도 명확한 소수의 주연이 있는 영화가 아니라서 좋았다. 좋았다는 말 이상으로 좋았어. 누구 하나가 주연이 아닌, 모두의 이야기였으니까. 일렁이는 물결을 그려낸 영화였고, 영화가 끝난 후에도 일렁이는 물결이 남았던 영화였다. 오래오래 이 일렁임을 기억하고 싶다.  

 

 

3. 밤의 해변에서 혼자 18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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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강릉 가고 싶다.

새벽 한 시에 틀어서, 약 세 시 즈음까지 보았다. 세 시가 넘은 지금도 마음은 싱숭생숭하고, 잠은 오지 않는다. 늘 피식거리게 되었던, 이전에 보았던 영화들과는 달리, 피식거릴 틈이 많은 영화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전의 어떤 영화보다도, 마음을 잡아끄는 대화가 많았던 영화이기도 했다. 

자전적인 영화는 아니라고 했지만, 너무나 대입이 잘 되는 이야기 속에서 현실을 떠올리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었고, 그래서 사실 이 영화를 어떻게 봐야 할까 스스로도 고민스럽다. 불륜을 다룬 영화는 아무리 연출이 좋고 영상미가 좋아도 스토리에 감정이입이 잘 되지 않는 편이라, 이 영화도 미루다 미루다 봤던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불륜을 다뤘다 해도 이 영화는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그들의 사랑 자체에 주목하는 게 아니라, 오롯이 영희의 감정에 집중한다. 사랑하지만 헤어진 이후의 영희의 고독을. 만약에와 꿈으로 뒤덮인 영희의 고독을. 고독 속에서도 영희는 수많은 시선을 마주한다. 내 일도 아닌데 궁금한 게 너무나 많다, 어딜 가든 뒤따르는 질문들과 소문들, 그리고 시선들.

영희는 낮의 해변에 홀로 누워 있다. 혼자라고 생각했지만, 누군가 와서 그녀를 자꾸만 깨운다. 이런 곳에서 잠들면 안 된다면서, 빨리 일어나라고. 영희는 어색하게 웃으며 일어나고, 한참을 걸어간다. 아무리 걸어도 영희에게 밤은 오지 않겠지. 아무리 밤을 찾아 헤매어도 언제나 환한 낮에 머물 수밖에 없겠지. 영희는 혼자이지만, 그래서 고독하지만 동시에 그 모든 시선과 소문, 질문들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테니까. 그래도 영희는 괜찮다고 답했으니까, 그리고  혼자서도 결국엔 일어날 수 있었으니까, 그 걸음의 끝에 종착지는 있지 않을까. 모르겠다.

좋았지만 동시에 어려웠다. 마지막 감독과의 대면 씬은 어쩌면 영화의 절정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장면은 도저히 마음이 안 가서 마음 속으로 생각하던 별점에서 0.5점을 빼 버렸다. 영희야, 너 매력적인 거 알지?를 반복하던 준희처럼, 그 와중에 김민희는 내내 반짝거렸다. 뭐 꾸민 것도 없고 까만 코트만 입고 나오는 김민희가 이렇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가. 홍상수가 아닌 다른 감독이 그려내는 김민희가 궁금해졌고, 그래서 너무나 보고 싶었지만 아직까지도 안 본 아가씨를 하루빨리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홍상수의 초기 작품을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 무엇보다 강릉에 가고 싶어졌다. 혼자.

 

 

4. 기억의 밤 18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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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의 긴장감은 쫄깃쫄깃하지만, 결말로 가면서 흐지부지된다는 평을 워낙 많이 봐서 큰 기대를 하고 본 영화는 아니었다. 이미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접했었기 때문에 초반의 미스터리는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도 했고. 그렇지만 영화 프로그램에서 봤던 장면이라 해도 사운드와 함께 연이어 구현되니 긴박감을 느끼게 되더라. 오랜만에 보는 스릴러 장르라 오랜만에 느끼는 그 기분이 더 반갑기도 했고, 그래서 더 몰입해서 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역시나, 결말로 흘러가면서 김이 새는 기분. 초반의 궁금증을 이런 방식으로밖에 풀어낼 수 없었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열심히 보고 있는 인간의 숲이 떠올랐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죽고 싶어, 죽여 버리고 싶어, 이런 말을 쓰는 건 그렇게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물론 그렇다 해서 쉽다는 말도 절대 아니지만), 그걸 또 행동으로 옮기는 건 별개의 일이니까. 당장 내가 죽게 생겼는데, 내가 살아야 하는데 그런 절박한 상황이라면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상대가 착한 사람도 아니고 반드시 살아야 할 이유를 지닌 사람도 아니고 끔찍한 연쇄살인범이라면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이미 너무나 많은 매체에서 그런 죽고 죽이는 상황들을 목격해 왔기에, 그런 극한의 상황을 가정한다면 그 인물이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겠다 생각했었다. 만화나 게임 등의 여러 매체 속에서는 (주인공을 제외한) 많은 인간들은 쉽게 죽어나가지만, 현실 속에서 사람은 사실 그렇게 쉽게 죽지도 않고, 그렇게 쉽게 타인을 죽일 수도 없구나. 참 당연한 건데, 인간의 숲을 보면서 새삼스럽게 충격적으로 다가왔었다. 그런 생각들이 겹쳐지면서, 이 영화에서는 그런 일들이 너무나 쉽게 그려진 게 아닐까, 싶어서 허무감을 느꼈다.  

 그 장면을 제외하고도 후반부의 반전을 풀어나가는 부분은 사실 내내 만족스럽지 못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흥미로운 인트로였기에, 마음을 졸이고 보게 되었기에 그만큼의 엔딩을 기대했는데. 사실 엔딩이 좋으면 이 영화 너무 좋았다,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특히나 아쉬웠던 것 같다. 그리고 진지해야 할 장면을 보다가 강하늘의 '죄송' 제스쳐와 표정이 떠올라서, 역시 강하늘은 악인일 수 없어..악인의 얼굴이 아니야..군대 생활은 어떠려나..하면서 영화 속 진석 대신 현실의 강하늘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래도 집에서 봤는데 이 정도 스릴이었으면, 영화관에서 봤으면 훨씬 몰입해서 볼 수 있었겠구나 싶었다. 요즘은 잔잔하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영화에 빠져 있었는데, 오랜만에 스릴러를 보니 그 나름대로 또 즐거웠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