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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현실적이고, 찌질하고, 짜증나는데, 웃긴
넷플릭스에서 어떤 드라마를 정주행해 볼까 고민하다가, 그냥 오늘 같은 일요일에는 영화나 한 편 볼까 했다. 절절하고 마음 시린 로맨스는 싫었고, 그렇다고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무거운 영화도 싫었고. 그냥 홍상수 영화가 보고 싶었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찌질하고, 짜증나는데 그러다가 웃게 되고. 넷플릭스에 있는 홍상수 영화 중 뭘 볼까 하다가 보게 된 게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이었다. 사실, 이 영화는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이 시점에서 이 영화를 보면, 그들을 오롯하게 영화 속의 인물로 볼 수 있을까 싶어서. 다른 이런저런 감정이 끼어들 것 같았고, 그 감정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도 영화 속 분위기나 줄거리나 이런 것들이 마음이 가서, 결국엔 봤다.
(실감 안 난다고 쓰고 몇 시간 지나지 않은 그 날 밤, 올라온 1박2일 클립을 보다가 그냥 눈물이 났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갑작스럽게 실감이 난 걸까. 연기하는 인물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조명하는 영상을 보니까 왜 우는지도 모르겠다 싶게 눈물이 났다. 어쩌면 아꼈던 사람을 보낼 수밖에 없는, 그 이별 과정이 슬펐던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을 오래오래 좋아하고 싶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오래도록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으니까. 물리적으로 가까이에 있는 것이 아니더라도 오래오래 마음 속에 품고 살아가고 싶으니까. 힘들고 우울한 순간마다 그 얼굴과 목소리를 떠올리고 싶으니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사람의 존재 자체에 감사하며 힘을 내고 싶으니까. 그냥 구구절절 길게 따질 것도 없이, 좋아하는 사람의 부재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으니까. 좋아하는 사람들과 물리적 거리가 멀어져서 (예를 들면 외국에 간다든지)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없게 되는 것도 조금은 두렵고,그 사람과 멀어지고 관계가 뒤틀리는 상상은 하고 싶어 하지도 않을 정도로 두려워하니까. 거기에서 더 나아간 이별은 아예 가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존재할 수 없다고 묻어 버렸다.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니까. 늘 이별이 서툴렀고, 이별이 두려웠다. 자연스럽게 멀어진 관계들도 남은 조각들을 늘 마음에 품고 있었다. 한번이라도 마음을 다해 좋아했던 관계들은 그렇게 마음에 남았다. 그래서 어쩌면 그 과정을 지켜 봐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도 모르게 눈물이 난 건 정말 오랜만이라서. )
사랑 좋은 거에요, 형. 인생 뭐 있어? 다 척이야 척. 다 똥 싸고 밥 먹고.
진짜 사랑하는 거, 사랑만이 가치가 있어. 나머지는 다 요식 행위야. 다 수작이야.
인생은 다 필요한 거야. 하나도 안 필요한 거 없어.
야식 포차에 앉아서 사랑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바로 그 장면. 격렬하게 사랑이 전부라고 말하는 영수와, 그에 대해 담담하게 인생에 필요하지 않은 것은 없다며 받아치는 형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제가 뭘 안다고 생각하고 뭘 하려고 했던건 다 실패했고요. 이제 다 방해가 될뿐이에요. 생각만 많았지 당신을 안 본 것 같애요. 정작 당신을 놓쳤어요.
개인적으로 영수의 찌질함이 극에 달했던 장면은, 민정이 모르는 사이인데 자꾸 반말 하는 게 기분 나쁘다며 존댓말 좀 쓰면 안 되냐고 하자마자 네 알겠습니다, 라고 답했던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극에 달한 찌질함을 보면서 웃음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굉장히 찌질하게 그려지지만, 사실상은 극 중 인물의 과장된 설정이 아니라 누구나 경험해 본, 그렇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은 순간들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더 웃음이 났다. 그리고 그 웃음을 짓게 되는 순간이 싫지 않았다.
하여튼 그 이후로 주구장창 영수는 민정에게 존댓말을 쓴다. 존댓말을 쓰면서 아름답다, 고맙다를 연발한다. 다시 만난 민정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고백한다. 이 대사 역시 민정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고백하며, 민정을 놓치지 않기 위해, 민정의 마음을 얻기 위해 치는 그런 대사였다. 민정에게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는 영수의 모습이 역시 찌질하게 느껴졌던 장면이지만, 막상 대사만 놓고 보면 굉장히 로맨틱하게 느껴진다.
사실상 영화는 내내 말과 믿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분명 민정이라는 여자인데, 저 여자는 내가 아는 여자이고 저 여자도 나를 모를 리 없는데, 그래서 가서 아는 척을 했더니 저 여자는 나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한다. "혹시 저 아세요?"라고 물어온다. 분명히 그 사람이 아닐 수가 없는데, 전혀 모르겠다고 본인이 부정하고 나서니 상대방은 존댓말을 쓰면서 그런가 보다 할 수밖에.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닮을 수 있나, 싶어서 신기하다고 말하자 민정은 이렇게 말해 온다. "그럼 그냥 즐기세요. 우리가 다 아는 게 그렇게 중요하진 않은 것 같아요."
아는 게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보고 듣는 것은 다 믿을 수 있는 사실인가. 내 친한 친구가 봤다고 말하는 건?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명의 사람들이 경험했다고 말하는 건 믿을 수 있는 것인가. 그런 경로를 통해 접한 사실은 내가 과연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수없이 많은 앎에 갇혀 막상 눈 앞에 있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무엇보다 명확한 것은,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알게 된 앎이 아니라, 과거의 내가 경험했던 앎이 아니라, 지금 함께하고 있는 바로 이 순간, 보이고 들리고 만질 수 있는 그 사람일 텐데. 민정은 그런 현실에 지긋지긋해졌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앎. 사랑하는 사람조차도, 있는 그대로의, 지금 이 순간의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앎의 진실 여부를 확인하기에 급급한, 그런 현실이 지긋지긋해졌을지도 모른다. 민정이 개새끼라고 말했던 건, 어쩌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그 수많은 앎들이었을지도 모르지. 그 앎이 진실이면 어떻고, 거짓이면 또 뭐 어떤가. 물론 앎 또한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진실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의 나일 텐데. 앎의 진실 여부를 가리기 위해 지금 이 순간 눈 앞에 있는 진실을 바라볼 기회를 놓친다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게 아닐까 싶기도.
항상 처음 만나는 것처럼, 모든 게 새로운 것처럼. 그 사람이 지금 이 순간 보여주는 모습들이 과거의 그 사람다운지, 아니면 완전히 다른 모습인지 그런 것들에 개의치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과거에 강 출판사에서 만났든 과거에 연인이었든 지나간 관계에도 얽매이지 않는 것. 민정이 던지는 메시지에 초점을 맞춰 영화를 보다 보면, 영화를 보면서 가장 크게 품게 되는 물음의 답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민정이 아니라고 말하는 저 사람은 정말 민정이 아닌 것일까. 아니면 민정이면서도 의도적으로 민정이 아닌 척하는 것일까. 혹은 민정이지만 자신이 민정임을 정말 모르고 있는 것일까. 정말 민정은 일란성 쌍둥이인 것인가. 뭐 이런 민정을 둘러싼 의문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민정이 아니든, 민정이든 그게 중요한가. 그냥 내 눈 앞에 있는 이 사람이 매력적이라는 사실만이 중요한 것을. 지금 이 사람이 좋아하는 것, 지금 이 순간에 원하는 것, 지금 이 순간의 감정에 초점을 맞추는 것보다 과거의 이 사람이 좋아했던 것,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나를 회상하는 것이 중요할 리가 없으니까.
이 영화를 관통하는 대사를 꼽자면, "혹시, 저 아세요?"겠지. 맑고 투명한 표정으로 묻는 민정의 그 물음이겠지. 어쩌면 그 물음은 당신이 알고 있는 자신은 어떤 사람이냐는 물음일지도 모르겠다. 나를 알고 있다고 말하는 당신은 과연 나에 대해 알고 있냐는 게 맞냐는 물음일지도 모르고, 알고 있다면 당신이 말하는 그 앎이 도대체 뭐냐고 묻는 것일지도 모르지. 매일 같이 만나도, 이 정도 되었으면 당신을 잘 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싶은 순간이 스쳐도, 여전히 나는 오늘의 당신을 알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니 섣부른 앎 속에 가두지 말아야지. 있는 그대로, 지금 이 순간의 당신을 바라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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