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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부럽지만 부럽지 않고, 두렵지만 두렵지 않아

 벌써 개강이 코앞이다. 여행 한 번 안 가고, 제대로 무엇인가를 뚜렷하게 하지도 않은 방학. 사실 스스로도 인정하지만, 그래도 그 시간에 얻은 게 무엇이냐고 물으면 없다고 하지는 않을 듯하다. 엄마가 아빠에게 하는 말을 들었다. 요즘 들어 행복이 참 별 게 없다는 생각을 한다고. 지금껏 딸을 키우면서 이렇게 오랜 시간을 붙어 지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요즘 들어 같이 점심 먹고 같이 수다 떨고 뒹굴고 하는 시간이 너무너무 행복하고 소중하다고. 다른 사람들은 진작에 그런 행복을 느끼면서 살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고. 그 말을 들으면서 참 마음이 이상했다. 엄마는 유달리 이번 방학에 우리가 친해졌다고 했고, 나는 엄마에게 우리가 언제는 안 친한 적 있었냐고 대답했지만 엄마가 그렇게 느낄 만도 했다, 싶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번 방학은 의미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세상엔 다 시기라는 게 있으니까. 우린 일에 있어서는 이 시기에 반드시 해야 하는 것들을 놓치면 큰일나는 것처럼 생각하면서도,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시간 날 때, 나중에 여유가 있어지면 하면 되겠지, 생각하고 미루는 경향이 있다. 생각해 보면, 아니다. 그것도 다 시기라는 게 있다. 그 시기를 놓치면 그 시기에만 할 수 있었던 것들을 할 수 없게 되고, 회복할 수 없게 되는 것들도 있다. 어떤 것이든 그 시기를 놓쳐도 되는 건 없다. 물론 모든 것을 다 챙길 수는 없겠지만.

 

 지나간 순간들에 대한 후회는 없지만, 되돌리고 싶은 순간들도 없지만, 분명 놓치고 온 것들이 있겠지. 내가 놓치며 살아온 것들을 놓치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도 많겠지.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얻고 더 적은 것들을 놓치며 살아온 사람들이 분명 있겠지만, 그리고 타고난 것들도 더 많은 사람들이 분명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과 내 자신을 바꿀래?라고 물으면 바꾸고 싶지 않다. 물론 부러운 사람들이 있지만, 부러운 것과 인생을 바꾸고 싶은 것은 별개지. 물론 바꿀 수 있는 일도 없겠지만. 그건 그만큼 내 자신을, 그리고 나로서 쌓아온 시간들을 사랑한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지. 그리고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게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른다. 이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아서, 이 사람들과의 관계를 놓고 싶지 않아서.물론 다른 사람들도 다들 이런 관계를 지니고 살아갈 테지만, 어쩌면 나보다도 더욱 소중하고 의미 있고 따뜻한 관계들을 품고 살아갈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해도 나는 이 사람들을 잃는다는 상상이 아득하고 두렵다. 그래서 내가 가진 다른 것들은 놓을 수 있다 해도 그 사람들과 관계는 놓을 수가 없고, 어떤 인생을 내 눈앞에 들이밀든 선뜻 바꾸겠다는 말을 하지 못할 것 같다. 그만큼 사람들을 사랑해? 그렇게 열정적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이 사람들 없이 사는 삶은 상상이 가지 않아서 놓을 수가 없다. 익숙하고 안정적인 게 좋아. 내 곁을 떠나지 않을 사람들, 오래오래 곁에 있어 줄 사람들, 언제 봐도 편안한 사람들, 사람들이 나에게 등 돌릴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고 전전긍긍하며 살지 않아도 되게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면서 살 수 있게끔 기반을 다져준 사람들. 이 사람들을 얻고 쌓아 온 시간이 얼만데, 물론 새로운 사람들과도 그런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겠지.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얼만데, 그렇지만 지금의 나는 그 새로운 과정을 거칠 열정과 에너지가 없고 이 사람들이 없는 상태라고 전제한다면 더욱 더 겁을 낼 거야. 겁을 낸다기보다는 글쎄, 그냥 그저 그런 관계들을 잔뜩 쌓아 두지 않을까. 함께 보낸 시간의 양은 무시할 수가 없다. 어떻게든 함께 보낸 시간이 많은 사람들은 그 시간만큼 정이 쌓여서, 그만큼 많이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된다. 처음엔 그 정도의 마음이 아니었다 해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차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사람이 자꾸만 뒤로 밀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자꾸만 앞으로 밀려오는 일들이 많겠지만, 그래서 자꾸만 사람을 뒤로 미루고 싶어질 때도 많겠지만, 그렇게 자꾸 미루다 보면 남는 게 없을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그렇게 사는 법에도 또 익숙해지면, 그렇게 사는 것도 살 만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게 너무나 까마득하고 두려워서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되뇌이고 또 되뇌인다. 굳이 그렇게 되뇌이지 않아도, 사람이라는 건 쉽게 변하지 않아서 그렇게 자꾸 뒷순위에 밀려나게 놔 두지 않을 것 같지만.

 

 지친 걸까. 외로운 걸까. 아니면 이제서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의 즐거움을 깨달은 걸까. 요즘의 나를 잘 모르겠는데, 그렇다 해서 질문을 하고 답을 찾고 싶지도 않다. 늘 개강 전에는 에너지를 비축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래서 굳이 무엇을 해야겠다, 부지런하게 살아야지, 하는 강박을 나에게 주지 않으려고 하고 있긴 하다. 그런데 이게 맞는지는 잘 모르겠어서, 이렇게 흘러가는 하루하루가 괜찮은 건지 잘 모르겠으면서도 하루하루에 굳이 집착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고. 아무 것도 모르겠는데 굳이 답을 찾고 싶지 않다. 답이 있지도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일까, 예전에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씩 정리하는 일이 즐거웠는데 요즘은 하고 싶지 않다. 더 이상 자기 소개를 쓰고 싶지 않아. 자기 소개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자유로운 자기 소개라 할지라도 하고 싶지가 않은 요즘이다. 예전엔 솔직한 자기 소개를 쓰는 건 즐거운 일이었는데, 요즘은 내키지 않는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그렇다 해서 혼자인 시간이 기쁘다거나 마냥 좋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혼자인 시간이 외로운 것도 아니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이 마냥 꺼려지는 것도 아니다. 우울한 것도 아니고, 그냥 늘 그렇듯이 적당한 수준의 감정을 갖고 지낸다. 사실 이전과 별다를 것 없는데, 그냥 뭔가 세상에 대한 의욕이 없는 사람이 된 것 같다는 기분을 느낀다. 이게 아예 지쳐 나가 떨어진 기분이면 모든 것을 그만두고 쉬어야지, 휴식이 필요한 거야, 할 텐데 방전된 기분은 또 아니다. 그럼 도대체 뭐야, 하겠지. 나도 도대체 뭔지 모르겠어서 이게 뭐냐고 다른 사람에게 묻고 싶은 생각도 없다. 뭔지 모르겠는데, 그냥 이러다 말겠지. 뭐든지 하고 싶은 게 넘쳐 났던 시기가 있으면, 뭐든지 그다지 하고 싶지 않은 시기가 오는 것도 당연한 거겠지. 지금의 나를 너무 의욕 없는 시기로 규정해 버리면, 또 그 프레임에 갇혀서 '지금의 나는 의욕 없는 시기니까, 뭐든지 괜찮아' 이렇게 합리화해 버리려나. 그래서 내 자신을 규정하는 일이 싫다. 스스로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은 즐겁고 의미 있었지만, 나는 이런 사람이야, 스스로 답을 내리고 그 이야기들을 적고 하다 보면 매 순간에 나는 이런 사람이야,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해, 끼워 맞추게 되는 것 같아서 하고 싶지 않을 때도 많았다.

 

 

 그래도 음악을 들으면서 일기를 쓰는 밤은 위로가 된다. 이것도 어쩌면 오랜 시간 쌓아서 길들여진 버릇일지도 모르지. 때로는 위로이고, 때로는 기쁨이고, 때로는 표출의 창구고. 어쩌면 나는 무엇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사랑 받고 싶다는 생각을 너무나 많이 해 왔는지도 모르겠다. 무엇을 잘하지 않아도, 자랑스럽지 않아도, 보잘것없고 무엇인가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래도 사랑 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떤 사람이든 곁에 있어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서 자꾸만 있는 그대로의 나에 대한 칭찬을 듣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을 많이 받았으면서도, 가끔은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지는 아이러니.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런 면을 품고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상대의 약한 면을 알게 되는 순간, 상대가 약하고 여린 면을 드러내는 순간 아마도 나는 그 사람을 더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도 어둡고 여린 면까지도 다 끌어안고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동시에 두렵다. 그러면서도 그 모든 면을 다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그런 사람이 아니면 사랑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동시에 찾아 온다. 재미있는 사람은 내가 할게, 너는 그냥 있어 줘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날이 떠올랐다. 재미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거, 웃음거리가 아닌 이야기들도 억지로 웃음거리로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싫어, (물론 시간이 지나 스스로 아무렇지도 않고 웃음으로 바꾸어도 된다면 괜찮지만 너도나도 웃음을 만들어내야 하는 배틀처럼, 진지함은 싹 가셔야 하는 분위기는 나에게 조금은 힘들었어) 같은 이야기를 돌려돌려 했던 날, 들었던 말이었다. 고마운 사람들이 있고 고마운 사람들 곁에서 앞으로도 살아갈 거야. 부럽지만 부럽지 않고, 두렵지만 두렵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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