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곡: 10cm – 그러니까…
어렸을 때는 반장도 많이 했고, 누군가를 대표하는 자리에 많이 나섰었다. 그때도 내가 자발적으로 나선 건 아니었던 것 같지만. 초등학교를 지나고, 중학교를 지나고, 점차 잘난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뛰어들면서 더 이상 자발적으로 나서지 않는 사람에게 리더의 자리를 맡기는 곳은 없었다. 리더의 자리를 벗어나는 건 편안했다. 아무도 줍지 않는 교실의 쓰레기를 주워야 할 것 같았고, 청소나 뒷정리를 할 때면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어야만 할 것 같은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내 할 일만 빨리 끝내면 되었고, 다른 사람이야 어쨌든 별 신경을 쓰지 않아도 괜찮았다. 모두가 잘하게끔 격려하기, 그렇게 해서 전체의 결과가 좋게끔 만드는 것은 리더의 역할이었을 뿐, 개개인에게 주어지는 부담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그 조직에 속해 있는 구성원으로서 전체의 결과가 좋으면 기쁘긴 했지만, 전체의 결과가 그다지 좋지 않다고 해서 나에게 해로울 것은 없었다. 나는 열심히 했고, 내 파트는 잘했어. 전체의 결과가 나쁜 건 내 탓은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잘 못해서 그랬어, 라고 어느 정도의 합리화도 가능했다. 물론 그렇게 다른 팀원 탓을 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완성도보다는 완성 자체에 의미를 두는 삶을 살았다. 일단 완성하면 된 거지, 다른 사람 파트까지 꼼꼼히 읽어 보면서 이건 이렇게 고쳤으면 좋겠고, 저건 저렇게 고쳤으면 좋겠어요, 세세한 피드백을 하는 삶을 살기 싫어진 것이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무엇인가를 책임져야 하는 자리를 맡으니, 부담스럽다. 수없이 많은 단톡방에 속해 있으면서도 3명을 초과하는 단톡방에서는 좀처럼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단톡방에서 가장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작년에도 경험했던 가장 큰 스트레스 중 하나는, 내가 무엇을 맡은 만큼 분위기를 주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말을 많이 하고 식어가는 분위기를 살리려고 애쓰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너무나 힘이 든다는 점이었다. 별스럽지 않은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얼마나 신경 써서 보내는지, 그 말투나 이모티콘을 얼마나 고쳤다가 다시 보냈다가 하는지 아무도 모르겠지. 그렇게 고민해서 보냈는데 별다른 답이 없으면 역시 이렇게 단톡방에서 말을 많이 하는 건 나랑 잘 맞지 않아, 생각하다가도 그런데 내가 여기서 말을 안 하면 어떡하나, 어쩔 수 없지,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단톡방에서 떠들었다. 결국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나서는 있는 듯 없는 듯한 역할로 돌아갔지만. 사실 평소 성격은 카톡 하나에 전전긍긍하는 타입도 아니고, 답장이 빨리 안 온다 혼자 속을 끓이는 타입도 아니지만. 오히려 그 정반대에 가까운 사람이지만 단톡방에서 말할 때면 그런 스트레스를 받곤 했다. 편한 사람들로만 구성된 카톡방이면 상관없는데, 그렇게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목적 있는 단톡방인 경우에는 편한 사람들로만 구성되기 쉽지 않았으니까.
다시금 느낀다, 나는 리더와는 그렇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구나. 맡겨 주면 열심히 하긴 하겠지, 최선을 다해서 어떻게든 좋은 결과를 얻으려고 노력하겠지. 그리고 막상 하게 되면 그렇게 못하는 건 또 아닐지도 몰라. 그렇지만 그 자리에 있는 내내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쏟아 버리고, 그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인 사람이구나. 누군가를 대표해서 앞에 나서는 게 즐거움인 사람이 있는 한편, 나는 그 자체가 즐거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니구나. 좋아하는 것은 많지만 좋아하지 않는 것도 많은 사람이자, 동시에 싫어하는 것은 없는 사람으로 살다 보니 어떻게 살아야 할지 더 불명확하다는 기분이 든다. 아예 나는 오이나 브로콜리는 입에 대지도 않아, 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아예 오이나 브로콜리는 먹지 않는다고 결정하면 될 텐데, 나는 오이나 브로콜리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먹으려면 먹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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