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들/책

무거움이 아닌 가벼움의 드라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호에호 2018. 1. 20. 13:30

중산모자는 강바닥이었고, 사비나는 매번 다른 강물, 다른 의미론적 강물을 보았던 것이다. 같은 대상이 매번 다른 의미를 야기했지만 그 의미는 이전의 다른 모든 의미와 공명을 일으켰다. (마치 하나의 메아리, 꼬리를 무는 메아리들처럼) 새로운 체험은 보다 풍부한 화음으로 공명을 일으켰다.
(중략)
사비나가 그 앞에서 중산모자를 썼을 때, 프란츠는 마치 누군가가 미지의 언어로 그에게 말을 거는 것 같은 불편함을 느꼈다. 그는 이 행동이 음탕하거나 감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의미의 부재로 인해 그를 당황케 하는 난해한 것이었을 뿐이었다.

-p151

별 것 아닌 물건에 기억을 쌓는 것. 누군가에게는 아주 특별한 물건이, 누군가에게는 별 감흥 없는 대상이기도 하고. 그 의미가 엇갈릴 때에 우리는 서로가 인연이 아닌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그렇지만 어찌 보면 의미가 다른 것은 너무나 당연했고, 서로를 알아간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 익숙해진다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익숙해질 수는 있을 망정, 평생토록 같은 의미를 갖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지나간 의미에 집착하기보다는, 이미 같아질 수 없는 의미들을 붙잡고 그 의미를 쌓은 사람들을 질투하기보다는, 앞으로 쌓아갈 새로운 의미들을 바라보아야겠지. 다른 누군가가 맞이한다면 당황케 하는 난해한 것일뿐이겠지만, 우리 둘만은 깔깔 웃을 수 있는 그런 것. 우리 둘만은 묘한 눈길을 주고받을 수 있는 그런 것. 어느 순간엔 보기만 해도 눈물을 쏟게 만드는 그런 것. 그런 것들이 쌓여 이전의 다른 모든 의미와 공명을 일으킨다는 것을 자각할 때의 묘한 느낌을 사랑해.

 

 

 

사비나에게 있어 진리 속에서 산다거나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군중 없이 산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행위의 목격자가 있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좋건 싫건 간에 우리를 관찰하는 눈에 자신을 맞추며, 우리가 하는 그 무엇도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군중이 있다는 것, 군중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거짓 속에 사는 것이다. 사비나는 작가가 자신의 모든 은밀한 삶, 또는 친구들의 은밀한 삶까지 까발리는 문학을 경멸했다. 자신의 내밀성을 상실한 자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라고 사비나는 생각했다. 또한 그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자도 괴물인 것이다. 그래서 사비나는 자신의 사랑을 감춰야만 한다는 것을 괴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진리 속에서' 사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p187

 

 

  매일 같이 일기를 써서 업로드하는 sns 계정을 만든 적이 있었다. 어렸을 적 친구에게 들킨 비밀 일기장이 트라우마로 남아서, 그 이후로 거의 10년 간 이름 하나 등장하지 않는, 명확하게 무슨 일이 벌어졌음을 쓰지 않는 일기를 써 왔던 사람에게 공개적인 일기를 쓴다는 것은 너무나 낯선 일이었다. 솔직해질 수 없었다.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 대신, 다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고 그 순간의 감정 대신 그럴 듯한 문장을 만드는 데에 집중했다. 어떻게 하면 사진을 잘 찍어서 선명하게 글씨가 보이게 할 수 있을까, 이 정도의 글씨체이면 괜찮은가에 집중했다. 물론 공개적으로 매일 쓴다고 했던 약속 때문에 의무적으로라도 매일 일기를 쓰게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그저 스치고 지나갔을 생각들도 기록하게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검열하게 되었다. 남들에게 내 글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은 있었지만, 이렇게 겉을 치장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녀는 자기에게 참을성이 없었던 것을 후회했다. 함께 더 오래 있었더라면 그들은 조금씩 그들이 사용했던 단어들을 이해하기 시작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어휘는 너무도 수줍은 연인들처럼 천천히 수줍게 가까워지고, 두 사람 각각의 음악도 상대편의 음악 속에 녹아들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나 이제 너무 늦었다.


-p205

 

검정치마의 TEAM BABY 앨범의 전곡을 다 좋아하지만, 유난히 빠졌던 가사가 있다. '우리는 같은 템포 다른 노래인 거야'. 같이 발을 맞추어 걸어가는 건 맞지만, 사실은 다른 사람들. 그리고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영원히 같아질 수는 없는 두 사람. 다름을 인정하는 게 좋았다. 사랑에 빠지면 자꾸만 같음을 확인하고 싶어지고, 같음을 확인할 때마다 우리는 천생연분이야, 우리가 연인일 수밖에 없는 거야 하고 확신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비슷하기 때문에 사랑에 빠졌다고 믿을 때도 있고.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발견하는 건 서로가 다르다는 사실뿐이고, 서로 같은 줄만 믿었던, 나를 온전하게 이해해줄 유일한 사람이라고 믿었던 사랑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만다. 그렇지만 사실 다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 걸. 시간이 지나다 보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되겠지. 가까워지고 녹아들 수 있겠지. 서로의 다른 언어를, 다른 시선을 이해할 수 있게 될 때까지의 짧지 않은 시간을 기다리는 것, 그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상대에게 오롯이 집중하는 것, 그게 사랑이 가진 힘이 아닐까. 애초에 같은 사람이어야 사랑인 것이 아니라.

 

 

 

포도주를 마시며 친구와 나누었던 대화가 라디오로 공개되었다는 것은 오로지 이렇게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이 집단 수용소로 바뀌었다고.
 테레자는 그녀가 가족과 어떻게 살았는지 표현하기 위해서 거의 유년기부터 이 단어를 사용했다. 집단 수용소, 그것은 밤낮으로 서로 뒤엉켜 사는 세계였다. 잔인성과 폭력은 이 세계의 부수적 (전혀 필연적이지 않은) 측면에 불과했다. 집단 수용소, 그것은 사생활의 완전한 청산이었다.친구와 술을 마시며 토론할 때 자기 집에서조차도 (그것이 치명적 실수였음에 틀림없다!) 안전하지 못했던 프로하즈카는 집단 수용소에서 살았던 것이다. 어머니 집에 살던 시절의 테레자는 수용소에서 지냈던 것이다. 그때 이후로 수용소란 아주 예외적인 것, 놀랄 만한 것도 아닌 뭔가가 주어진 조건, 뭔가 근본적인 것, 세상에 나왔을 때부터 있으며 온 힘을을 다해 극도로 긴장했을 때만 벗어날 수 있는 그 어떤 것임을 그녀는 알았다. 
                                                                                                                 -p222

 

 군대 생활이 왜 힘든지 아냐고, 그런 톤의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사회 생활이든 뭐든 아무리 힘들고 지옥 같아도 일이 끝나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지 않냐고, 괴로운 생활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지 않냐고. 그런데 군대는 그런 시간이 없이 24시간 함께해야 한다고, 나를 괴롭히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이 모든 것을 함께해야 한다고. 그 글을 읽자마자 너무 끔찍해, 그렇게 생각했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면서 사는 것,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살아감으로써 내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 것, 그게 인간 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삶이라.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한다 해도, 혼자만의 시간을 필요하다 생각했다. 누군가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 없는. 아무 생각 없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이걸 어떻게 생각할까, 이게 문제가 될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스스로에 대한 검열 따위 필요없는. 이게 좀 괜찮아 보이나, 더 다듬어야 하나 이런 것 따위 필요없는. 그리고 가장 큰 배신감을 느끼는 순간은, 혼자만의 시간이라 믿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누군가는 엿듣고 있었고, 엿보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배신감보다는 평정심에 금이 가는 순간. 그런 순간들은 아주 어렸던 순간부터, 꽤 최근에 이르는 순간까지 자주 있어 왔기에 이 문단에 크게 공감했던 것 같다. 그 순간들이 언제 찾아올지 몰라 두려워서, 혼자만을 위한 기록이라 여겨지는 것들도 어느 정도의 필터링을 늘 거칠 수밖에 없었다. 완전한 솔직함을 담을 수가 없었다. 모호하고 나만이 명백히 알아볼 수 있는 기록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솔직한 글만큼 재미있는 글은 없어, 솔직한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라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되더라. 그래도 여전히 솔직한 글은 두렵다. 읽고 나서 이게 내 이야기네, 알게 되는 글을 쓰고 싶지 않아. 당사자는 몰랐을 내 마음을 굳이 보여 주고 싶지 않아. 그렇지만 언젠가는 쓰고 싶어.

 

 

 

 얼마 후 그는 다시 이런 생각을 했고, 나는 앞 장의 뜻을 밝히기 위해 이를 언급하고자 한다. 우주 어디엔가 우리가 두 번째 태어나는 행성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또한 지구에서 보낸 전생과 거기에서 익힌 경험을 완벽하게 기억한다고 해 보자.                                                                                                           
 그리고 이미 두 번의 전생 체험을 가지고 세 번째로 태어나는 또 다른 행성이 존재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인류가 매번 더욱 성숙하면서 다시 태어나는 다른 행성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영원회귀에 대한 토마시의 생각이다.
 지구(1번 행성, 미체험 행성)에 사는 우리는 당연히 다른 행성에서 인간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는 막연한 개념밖에 지닐 수 없다. 인간이 더 현명해질까? 인간이 완숙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반복함으로써 이에 도달할 수 있을까?
 비관주의와 낙관주의가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런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 속에서만 가능하다. 낙관주의자란 5번 행성에서는 인간 역사가 피를 덜 흘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비관주의자란 그런 것을 믿지 않는 자이다.

                                                                                                             -p359 ~ 360 

 

 

 만약에 놀이는 가끔 흥미로울 때가 있다. 어차피 벌어지지도 않을 일을 가지고 왜 쓸데없이 고민을 하느냐, 이런 생각을 할 때도 있지만 이렇게 흥미로운 가정을 만나면 즐거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요즘은 세상이 변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변화를 믿는 작은 마음들이 모여서, 그 작은 목소리와 노력들이 모여서 세상이 조금씩 더 나은 곳으로 변화해 갈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낙관주의자에 속하는 것 같다. 5번이나 다시 태어났는데, 조금은 더 나아져야 하지 않을까. 이미 과거의 비참한 기억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비극적인 역사들을 다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그대로 반복한다는 것은 너무나 인류애를 상실하게 되는 결과가 아닐까. 1번 행성에 사는 우리들이야 그런 결과를 초래할지 몰랐어, 그렇게까지 엄청난 일이 될지 몰랐어, 라고 변명할 수라도 있겠지만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다시 저지르는 건 그런 변명의 여지조차 없으니까. 
 

 

 고작 5번으로는 완숙한 경지에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겠지. 5번을 돌아도 피를 흘리는 이들은 여전히 존재하겠지. 사실 이렇게 쓰면서도 계속 똑같은 상황이 끊임없이 반복될까 봐, 결국 인간은 그 정도가 끝이야를 보여주는 게 현실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역사는 반복되니까, 기술의 발전으로 형태는 달라져도 서로 물고 뜯는 건 여전히 남아 있으니까. 여전히 세계 한쪽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그 전쟁에서는 이해 관계와는 전혀 무관한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고. 굳이 전쟁 등으로 인해 총칼 들고 싸우는 게 아니더라도, 누군지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관여하고 말을 지어내고 공격하고. 그 과정에서 결국은 비극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그 비극적인 선택에서마저도 깔깔대는 사람들이 있는 세상. 그것뿐일까, 충분히 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흡하고 불필요한 시스템 때문에 구하지 못한 사건들이 끊임없이 발생하며, 무슨 일이 생기고 나서야 대책을 마련해 보겠다 급급하지만 과연 비슷한 일이 또 벌어졌을 때 잘 대처할 수 있는 것인지 신뢰가 가지 않는 세상. 누군가에게 즐거움을 주겠다고 개인을 착취하는, 그렇게 개인을 갈아 만든 콘텐츠들과 제품들이 판치는 세상. 그래도 세상을 믿고 싶어지는 건, 포기하지 않고 자기 자리에서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겠지. 변화를 믿고,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봤고, 그 사람들이 만들어낸 변화들도 봤다. 그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기에, 세상을 믿기로 했다. 눈에 띄는 유의미한 변화가 보이기 위해서는 몇천 번을 회귀해야 한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피를 덜 흘리는 세상이 올 거라고 믿어. 인간에 대한 그 정도의 애정은, 인간이 만들어 갈 세상에 대한 그 정도의 애정은 놓지 않고 살아가기로 했다.  

 

 

 전체주의적인 키치 왕국에서 대답은 미리 주어져 있으며, 모든 새로운 질문은 배제된다. 따라서 전체주의 키치의 진정한 적대자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인 셈이다. 질문이란 이면에 숨은 것을 볼 수 있도록 무대장치의 화폭을 찢는 칼과 같은 것이다. 사비나가 테레자에게 자기 그림의 의미를 이런 식으로 설명했다. 앞은 이해 가능한 거짓말이고 그 뒤로 가야 이해 불가능한 진실이 투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소위 전체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사람은 질문과 의심을 가지고 투쟁할 수 없다.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되어야만 하고 집단적인 눈물샘을 자극해야만 하는 확신과 단순화된 진리가 그들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p411 

 

 

대항의 시작점은 질문이었지만, 대항의 과정에서는 어느 순간 질문을 잊어 버리게 된다. 질문은 의심을 동반하는데, 의심은 확신을 줄 수 없으니까.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확신을 갖지 못하고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믿음을 주지 않는다. 그렇지만 변화를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뜻을 하나로 모아야 하고,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확신을 주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확신을 주려고 노력하다 보면, 어느 순간 질문과 의심은 사라지고 의심해 왔던 명제는 틀릴 수 없는 진리가 되어 있다. 무조건 옳다고 가정하는 것, 정답과 오답을 명백히 갈라 놓는 것, 그 형태는 전체주의적인 키치 왕국에서도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나. 가끔 목표를 정해 두고 목표만 바라보고 달려가다가, 순간 지금 내가 어디에 있나를 바라 보면 멍할 때가 있다. 여기에 있는 게 맞나, 내가 꿈꾸던 건 이게 아니었는데. 이렇게 해서라도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면 그게 맞는 길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