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면 제일 무서운 걸 보고 싶었어.
남자가 안 생기면 호랑이는 평생 못 봐도 상관없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게 되네. 고마운 줄 알라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하고 싶은, 조금 특별한 로망 하나쯤은 간직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 로망이 현실이 되었을 때, 꼭 이렇게 말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하고 싶은 일이었다고. 그렇지만 수줍고 부끄러워하는 게 아니라, 조제처럼 무심하게 툭 뱉듯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해 줘서 고맙다 말하는 게 아니라, 그런 좋아함의 대상이 된 것에 고마운 줄 알라고 말하고 싶어졌던 것이다.
어쨌든 이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귀여운 장면이 아니었나 싶다. 제일 무서운 존재가 호랑이였던 것도, 그런 호랑이가 무서워 눈을 질끈 감으면서 저런 대사를 치는 조제의 사랑스러움이 극에 달했던 장면.
"있잖아, 눈 감아 봐. 뭐가 보여?"
"그냥 깜깜하기만 해."
"거기가 옛날에 내가 살던 곳이야."
"어딘데?"
"깊고 깊은 바닷속.. 난 거기서 헤엄쳐 나왔어."
"왜?"
"너랑 세상에서 가장 야한 섹스를 하려고."
"그랬구나.. 조제는 해저에 살았구나."
"그 곳은, 빛도 소리도 없고 바람도 안 불고 비도 안 와. 정적만 있을 뿐이지."
"외로웠겠다."
"별로 외롭지는 않아. 처음부터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그냥 천천히 천천히 시간이 흐를 뿐이지. 난 두 번 다시 거기로 돌아가지 못할 거야.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 껍질처럼 혼자 깊은 해저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 그것도, 그런 대로 나쁘진 않아."
이 장면만으로도 충분히 조제는 볼 가치가 있는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이 장면을 다시 되짚어 보면서, 왜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조금은 울고 싶은 기분이었는지 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인물들은 나와 닮았다기보다는 다른 쪽에 더 가까운 인물들이었다. 제멋대로이고, 자유롭고, 감정 표현하는 것에 능숙하며, 솔직한 사람들. 이터널 선샤인의 클레멘타인 같은 인물들을 나와 달라서 동경했고 좋아했다면, 이 장면을 보면서 깨달았다. 조제는 나와 닮은 인물이었구나. 미처 인식하지 못했지만, 그랬구나. 그래서 나는 조제를 좋아하면서도, 조제를 지켜보는 내내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구나, 싶었다.
조제는 원래 츠네오에게 벽을 치던 인물이었다. 츠네오가 다시 찾아왔던 날에도, 츠네오를 좋아한다는 말을 솔직히 꺼내지 못했고, 사실 괜찮지 않으면서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하게 말을 한다. 조제 같이 자신을 표현하기보다는 숨기는 것이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괜찮지 않다고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분명히 괜찮을 리 없는 이야기를 할 때에도, 괜찮은 척 담담하게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괜찮지 않은 상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익숙하지 않은 일이니까. 적어도 하나쯤은 숨겨야 이야기를 꺼내 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것이 익숙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순간은, 아마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꺼내지 않고서, 혼자서는 도저히 버티지 못할 만한 이야기가 생겼거나, 아니면 눈 앞에 있는 그 사람에게는 온전한 자신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나.
늘 누군가를 급하게 찾는 순간은 그랬다. 하나도 담담하지 않으면서, 내 정신도 못 챙기겠고 흔들려서 도저히 혼자는 못 있겠다 싶은 순간. 그래서 급하게 다른 사람을 찾았으면서, 그 와중에 아무렇지 않은 척, 마음에도 없는 상대의 안부를 먼저 물었다. 실컷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다가, 그제야 어렵사리 나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도 꺼내지도 못했던 예전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다고, 많이 발전했다고, 그 변화가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요즘은 하도 자기 이야기를 잘 꺼내는 사람들, 그것도 재치 있게 잘 표현해 내는 사람들을, 혹은 진지하게 잘 풀어 놓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내가 변화했다기보다는 더디고, 멈춰 있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런 내 모습을 탈피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고, 부럽다는 생각도 했지만, 어쨌거나 앞으로도 나는 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탈피하기 이전에, 나는 그냥 그런 내 모습을 인정하고 싫어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그래서 사실 가 버리라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조제를 보면서 진부해, 짜증나, 이런 생각을 잠시 했다. 난 있는 그대로 솔직한 게 좋으니까, 솔직하지 못해서 어긋나는 관계만큼 엉망인 것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지만 결국에 조제는 무너진다. 있는 그대로 무너진다. 엉엉 울면서, 가지 말라고 츠네오를 붙잡는다. 조제는, 처음부터 솔직하게 자기 감정을 말할 줄 알고, 자신이 바라는 바를 명확하게 표명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 해서 꽁꽁 숨기고 아예 모르게 하는 답답한 사람도 아니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끼는 장면인 바로 이 장면, 조개 껍질 씬만 해도 그랬다. 어쩌면 조제의 가장 사적인 이야기, 가장 여린 이야기, 쉽게 꺼내지 못할 이야기었겠지만, 꼭 하고 싶은 이야기였을 테다. 더군다나 츠네오와의 이별을 예감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여전히 조제는 츠네오를 사랑하는 상황이었기에 더욱 더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였을 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더욱 더 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겠지.
조제는 해맑고 가벼운 이야기인 것처럼 말을 시작한다. 왜 헤엄쳐 나왔냐는 질문에 농담을 할 정도의 여유도 있다. 그리고 끝까지 직접적으로 언급을 하지 않으면서, 바닷속에 비유해서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냥 그런 모든 게 너무 닮아 있어서, 조제가 그렇게 좋으면서도 그렇게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나 보다. 조제가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가려서, 미처 우리가 그렇게 닮은 점을 많이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뿐이었나 보다. 당찬 사람이고 싶고, 누구에게 딱히 지고 싶지도 않고, 내 할 말 못하고 살고 싶지도 않고, 그래서 겉으로 보기엔 자기 할 말도 하고 자기 할 일 잘 해내고 그런 사람이지만, 막상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건 어려운 사람.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어려워하면서도 사실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내봉리 수 있는 누군가를 찾기를 간절히 바라는 그런 사람.
이 영화에서 매 순간의 조제를 사랑했다. 담담하지 않은 게 더 정상적인 상황에서, 너무나 담담한 조제를 사랑했다. 기 죽었을 것만 같은 상황에서도 기죽지 않고 너무나 당당한 조제를 사랑했다. 호랑이를 보며 겁먹고 바다를 보며 마냥 신나 하고, 마냥 어린애처럼 조르던 조제를 사랑했다. 그리고 조제를 더 사랑하게 된 건, 사실은 츠네오가 떠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막상 둘의 이별 장면은 담담했지만, 조제는 장난 스럽게 이별 선물을 건네기도 했지만, 츠네오가 무너지는 장면은 나오고 조제가 무너지는 장면은 나오지 않았지만, 조제가 어떤 마음으로 이별했을지 너무도 잘 알 것 같았다. 조제가 한 모든 말들을 어떤 마음에서 했을지 안다고 하면 비약이겠지만.
클레멘타인이나 썸머를 좋아했지만, 그들 역시 이별의 순간을 경험한 인물들이었지만 단 한 번도 이렇게 마음이 쓰인 적 없었다. 조제만 생각하면, 조제가 너무도 좋으면서도 조금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던 건, 조제와 내가 닮아 있어서였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다. 길 잃은 조개 껍질처럼 혼자 깊은 해저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것, 그게 어떻게 그런 대로 나쁘지 않을 수 있냐고, 누군가는 조제를 동정할지도 모르고, 저 말을 자신을 두고 이별할 마음을 먹는 츠네오를 위해 건네는 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저 순간에 조제가 얼마나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내 보인 순간인지 알 것 같았다. 저 순간이 오래도록 조제에게 선명하게 남아 있을 것이라는 사실도.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츠네오라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지도.
사실 츠네오가 눈에 들어온 순간은 그렇제 많지 않았는데, 저 순간의 츠네오는 참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이야기에는 딱 저정도의 리액션이 필요했으니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저 정도. 츠네오가 친 대사는 별로 있지도 않은데, 근야 저 장면에서의 츠네오의 반응을 보며 조제가 츠네오를 사랑할 만했구나,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꿈꾸는 이상적인 연애 중 하나가 '상실의 시대'의 미도리와 와타나베의 관계였다. 가벼움과 진지함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츠네오와 조제는 이상적이라고 할 만큼은 아니었지만, 둘이 장난치는 모습이 바보스러우면서도 귀여웠고, 또 예뻤다. 조제처럼 벽이 높았던 사람이 있는 그대로의 매력적인 모습을 내보일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조제와 츠네오는 그런 관계였기 때문에, 앞으로도 불쑥불쑥 찾아올 그런 인물들이 아닐까 싶다. 겨울이면 또 보고 싶은 영화가 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