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서 무엇을 보는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이 이야기의 요점이 무엇일까? 이 이야기는 사람이 미망[사랑, 자신이 달걀이라는 믿음]에 빠져서 살 수도 있지만, 그것을 보완해주는 것[비슷한 미망에 빠져 있는 클로이와 같은 연인, 토스트 한 조각]을 찾아내면 모든 일이 잘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미망은 그 자체가 해로운 것이 아니다. 혼자서만 그것을 믿을 때,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못할 때만 해가 된다. 클로이와 내가 사랑의 노른자위를 말짱하게 보존할 수 있다면, 진실이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는 직선적 경계나 직선 없는 사랑을 갈망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분류하는 것,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낙인을 찍는 것[남자, 여자, 부자, 가난한 사람, 유대인, 가톨릭 신자 등]에는 병적인 저항감을 느낀다. 결국 우리 자신에게 우리는 늘 낙인을 찍을 수 없는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낙인이 찍히고, 성격 부여가 되고, 규정될 수밖에 없듯이, 우리가 사랑하게 된 사람도 우리를 바비큐 꼬치에 꿰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다만 적합하게 꿰는 사람일 뿐이다. 대체로 우리 스스로 사랑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점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 대체로 우리가 이해받고 싶어하는 점들에 대해서 우리를 이해하는 사람인 것이다. 클로에바와 내가 함께 있다는 것은 적어도 지금 당장은 우리에게 우리의 복잡성이 요구한느 대로 팽창할 만한 공간이 주어졌다는 뜻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연애 유형에는 단 두 가지뿐이라고. 연인과 베스트프렌드가 되고 싶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나는 당연히 전자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여럿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신기하게도 거의 반반으로 갈리더라. 나는 언제나 연인이 아무말대잔치를 벌일 수 있는 사람이기를 꿈꿨다. 연인과 있을 때만큼은 격식을 차리고 싶지 않았고, 온전한 나로 있기를 바랐다. 그렇기에 나는 언제나 직선적 경계나 직선 없는 사랑을 갈망해 왔겠지. 나를 어떤 사람으로 정의하고, 그 틀 안에 있는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 자체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꿈꿨겠지. 내가 더 이상 그 틀 안에 있지 않다고 하면, 변하는 사랑은 너무나 불안할 테니까.
그렇지만 아무리 연인이라고 해도 나의 모든 측면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 역시 나의 모든 측면을 알 수는 없는데, 연인이라고 해서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그리고 연인과 가장 친한 친구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연인에게 그렇게 모든 모습을 다 보여주는 것이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싶어서. 서로에게 우리 스스로 사랑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점만을 보여주는 것, 우리가 이해받고 싶어하는 점들에 대해서 내보이고 이해받는 것. 그 정도만을 서로에게 내보이고 감싸안는 게 관계를 오래 지속하기 위한 예의일지도 몰랐다.
어린 시절 내내 나는 겨울방학을 고대했다. 가족이 두 주 동안 알프스로 스키를 타러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산꼭대기에 올라가 밑의 소나무로 덮인 골짜기와 위의 부서질 듯한 파란 하늘을 보면 실존적인 불안에 완전히 사로잡히곤 했다. 그러나 그 일에 대한 기억에는 그런 불안이 증발해 버리고 없었다. 기억은 객관적인 조건들[산꼭대기, 부서질 듯한 파란 날]로만 이루어져서, 실제 그 순간을 힘겹게 만들었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불안은 내가 코를 줄줄 흘렸거나, 목이 말랐거나, 목도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한 해 내내 나를 위로해 주었던 미래의 가능성 하나가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주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슬로프 바닥에 이르자마자 나는 산을 돌아보며 완벽한 활주였다고 혼자 되뇌었다. 스키를 타던 방학은 [일반적으로 내 삶의 많은 부분도] 그렇게 흘러갔다. 아침의 기대, 현실에서의 불안, 저녁의 유쾌한 기억.
기억은 왜 미화되는 걸까, 늘 궁금했었다. 막상 당시에는 마냥 행복했던 것만은 아닌데, 지나고 나면 왜 행복했던 기억만 선명한 걸까. 행복한 순간은 선명했던 반면, 우울했던 기억은 그다지 선명하지가 않아서 애써 꺼내 보고 나서, 이런 말을 들었구나, 그런 상처를 받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기억이 나지 않을 수 있지, 하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나의 기억이 미화되는 현상도 이렇게 설명이 될 수 있는 걸까. 맞는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게, 얼마 전의 일만 해도 그랬다.
클로이와 내가 흔히 주고받는 농담이있었다. 우리 마음의 간헐적 성격을 인정하고, 사랑의 빛이 전구처럼 항상 타올라야 한다는 요구를 완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무슨 문제가 있어? 오늘은 나를 좋아하지 않아?"
둘 중 하나가 그렇게 묻는다.
"덜 좋아해."
"그래? 아주 많이 덜?"
"아니, 그렇게 많이는 아니고."
"10점 만점이라면?"
"오늘? 어, 한 6.5 정도. 아냐, 6.75에 더 가깝겠네. 너는 어떤데?"
"어이쿠, 나는 마이너스 3 정도인데. 오늘 아침에 네가...할 때는 12.5 정도였던 것도 같지만."
이런 식의 농담을 너무 좋아한다. 왜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건네는 장난을 좋아할까. 사실상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건네야 하는 상황이 더 많아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건네는 좋아한다, 라는 말의 무게는 가벼우니까, 평소엔 그렇게 좋아한다는 말이 어려웠던 사람도 쉽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보고 싶다는 말도 같은 의미에서 쉬웠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좋아한다는 말이 어려웠다. 그 말이 진심이 담겨 있으니까, 같은 맥락에서 가볍게 사용할 수가 없었나 보다. 장난치듯 건넬 수 있는 말이 아니고, 일상적으로 건넬 수 있는 말이 아니었나 보다. 생각해 보면 그래도 되었는데. 그러는 게 어쩌면 서로 좋아하는 관계에 있어 훨씬 나았을 텐데.
대신에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즐겼던 것 같다. 사실은 좋아하면서 좋아하지 않는다, 라고 말하는 것.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보여주는 상대의 반응이 재미있어서이기도 했지만, 마찬가지로 상대가 나에게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그게 가벼운 의미였다면, 나는 꺄르르 웃고 싶은 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마치 이 농담처럼, 나는 덜 좋아해, 라고 말했을 때 어떻게 덜 좋아할 수가 있어, 하고 분노를 하기보다는 그래? 아주 많이 덜? 이라고 물을 수 있는 사람에 가까웠다. 사실 이 농담이 너무 내 취향이어서, 연인과 이런 장난을 칠 수 있으면 너무 행복하겠다 싶었다. 이런 농담을 하는 이유가 마음의 간헐적 성격을 인정하고, 사랑의 빛이 늘 전구처럼 타오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때문이라고 했지만, 나는 이런 농담을 할 수 있고 이렇게 받아칠 수 있는 상대라면 이전보다 훨씬 사랑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에 빠지는 것도, 사랑이 식어버리는 것도 한 순간이니까. 그것도 아주 사소한 순간.
내 소망은 내가 모든 것을 잃고 "나"만 남았다고 해도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다. 이 신비한 "나"는 가장 약한, 가장 상처받기 쉬운 지점에 자리잡은 자아로 간주된다. 내가 너한테 약해 보여도 될 만큼 나를 사랑하니? 모두가 힘을 사랑한다. 하지만 너는 내 약한 것 때문에 나를 사랑하니? 이것이 진짜 시험이다. 너는 내가 잃어버릴 수도 있는 모든 것을 벗어버린 나를 사랑하는가? 내가 영원히 가지고 있을 것들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