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좋아하는 것들
영화
로렌스 애니웨이
- 영화도 영화지만, 엔딩곡으로 나왔던 Craig Armstrong - Let's Go Out Tonight을 내내 들었다. 따뜻하게 안아주는 느낌. 이 노래를 주구장창 듣다 보니 로렌스 애니웨이의 마지막 장면과 겹쳐져 로렌스 애니웨이가 더 애틋하게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사실 로렌스 애니웨이가 좋은 영화였던 건 사실이지만, 지나치게 러닝타임이 긴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 그렇지만 지나고 나니 더욱 애틋하고 마음 쓰이는 영화로 남았다. 자비에 돌란과의 첫 만남이었는데, 자비에 돌란만의 색이 더욱 궁금해졌던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 보는 내내 조금은 울고 싶은 영화였다. 조제라는 인물이 너무 좋았는데, 담담해서는 안 될, 안 될 것까지야 없지만 도저히 담담할 수가 없는 순간들을 너무나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게 너무 마음이 쓰여서. 사실은 그 담담함이 좋아서, 그런 모순적인 담담함이 좋아서 조제를 더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끝을 예감하는 건 언제나 슬프다. 슬프다는 단어는 뭔가 단어 자체가 예쁘지도 않고, 그 이상한 감정을 딱 저렇게 세 글자로 요약해 버리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리고 오늘 나는 ~해서 기뻤다/ ~해서 슬펐다 이렇게 가장 단순하고 기초적인 감정 표현으로 쓰이는 말이기 때문에, 슬플 때 슬프다는 말을 도통 쓰고 싶지가 않다. 이 이상하고 미묘한 감정을 아주 기초적인 감정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 같아서, 아니면 내 표현 능력이 그렇게 기초적인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러나 사실은 그런 단계에 머무르는 게 맞는 것 같다. 이 이상한 감정을 슬프다는 말 말고는 대체할 수 있는 말이 없는 걸.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보면서 내가 일본 영화를 좋아하는구나, 싶었다. 그 잔잔하고 조용히 흘러가는 감성이 좋았다. 그냥 일본 영화만의 자연스러움. 풍경도, 색감도 모두 예뻤고. 일본 영화는 몇 번 보지 않았는데, 조제를 보고 난 이후에는 다른 영화들도 좋아하겠다, 하는 확신이 생겼다.
겨울이 오면 조제를 또 꺼내 보고 싶을 것 같다. 조제가 나오는, 조제가 좋아하던 소설도 읽고 싶고. 어느 순간에는, 조제를 보면서 조금은 울고 싶을 정도가 아니라 엉엉 울어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모차 안에서, 팔이 닿지 않아도 뺨을 맞고서는 뺨을 맞받아칠 당참이 있던 조제를 사랑해. 마지막 순간에 아무렇지 않게 작별 선물을 건네던 조제도, 아름다운 이야기의 모양을 빌려서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해 내던 조제도 사랑해. 사랑하지 않기에는 조제가 너무 매력적이었는 걸. 그래서 울고 싶어졌는 걸. 그래도 여전히, 조제를 사랑해.
조제를 보면서 또 좋았던 지점 중 하나는, 조제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동정이 아니었다는 점. 물론 조제를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등장했지만, 그와 대비되게 조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조제를 사랑했지, 조제를 동정하는 게 아니었다. 조제를 배려하고 도와 주지만, 그게 동정에서 비롯된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 미묘하고도 자연스러운 배려는, 어쩌면 아주 의식해야만 가능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런 사람들이 곁에 있었기에, 어쩌면 조제도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당당히 요구하고, 무력해지지 않고 칼을 들고 덤빌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조제가 그런 사람이었기에, 주변 사람들 역시 조제를 그렇게 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웹툰
- 아 지갑 놓고 나왔다
여중생a를 너무나 좋아했는데, 여중생a가 끝나 버렸다. 비슷한 웹툰이라고 추천한 것을 많이 봤지만, 꼭 소개할 때마다 들어가 있는 어두운 분위기를 너무나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그림 하나, 가볍지 않은 웹툰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간략한 소개 때문에 사실 조금 미뤄두고 있었던 웹툰. 마음 가볍게, 아무 생각 없이 읽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그렇다 해서 무슨 준비를 하고 읽을 것은 아니지만, 한강 소설도 그렇고 내가 조금은 감당하기 버거운 우울을 담고 있는 작품들은 내 자신이 우울을 자각하고 있을 때에는 읽지 않았다. 하여튼 읽었다.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방식도, 상처받은 인물들을 묘사하는 방식도, 그리고 결국엔 상처에 새살이 돋는 과정을 그려내는 방식도 모두 좋았던 웹툰. 개인적으로는 무당 아주머니가 등장하는 게 너무 좋았다. 한 동안 판타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들을 멀리 하고 살았었는데, 이 웹툰의 설정은 너무 좋았다. 꿈을 휘감아 주는 건 가장 좋았고, 확실한 미래가 아니라 가장 가능성이 높은 미래를 보여주는 것도 좋았고. 하여튼 꿈이라는 소재를 활용한 것은 신의 한 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꿈을 활용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구나, 너무나 적절했다. 억지로 이해를 강요하는 것, 억지로 이럴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며 화해를 강요하는 것, 나는 이해할 준비도, 용서할 준비도, 화해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는데 억지스럽게 보여 주고 일사천리로 그 복잡했던 감정들을 순식간에 긍정적인 감정으로 바꿔 버리는. 그리고 나서 감동받았지? 하고 기대하는 장면들을 넣는 건 정말 좋아하지 않는데, 전혀 그런 억지스러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가볍게 상처를 치유해 버렸으면, 정말 화가 났을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