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8 뭐가 그렇게 지겨운지도 모르면서 지겹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글을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몹시 외로웠고, 외로웠지만 그 누구에게도 기대고 싶지 않은 날이었다. 이해 받고 싶지도 않았고, 이해 받기 위한 노력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모든 해맑음 속에 지쳤다. 아무렇지 않은 척, 웃음이 나는 척 반응하는 게 더 지겨웠다. 기분이 좋아지면 그 모든 일을 또 아무렇지 않은 척 해낼 수 있으려나. 적어도 오늘은 아니었다. 길게 연락을 안 한다 해서, 이 사람의 마음이 가라앉아 있나 보다, 생각할 사람은 없을 터였다. 그냥 또 연락하기 귀찮은가 보다 생각할 게 뻔했다.
굳이 가라앉아 있다고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 알아주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묘한 감정이었다. 그냥 혼자의 시간이 좋았다. 조용히 킬빌을 보다 잠들려고 했는데, 도통 잠이 오지 않아서 다시 불을 켜고 tv를 보러 나갔다. 잠시 tv를 보면서 굿피플을 들여다 보았는데, 마음이 소란스러운데 남의 인턴 생활기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너무나 순수하고, 너무나 열정적으로 그려내는 그 프로그램이 오늘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그렇게 순수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열정적이지도 않았다. 무엇인가를 다 바쳐 잘해내고 싶은 마음이 있지도 않았고, 그렇게 노력하지도 않았다. 어떻게 보면 게으르다고 할 수도 있는데, 게으르다 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었다.
이럴 땐 마음이 차분해지는 글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금희의 글이 읽고 싶었다. 조금은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는, 문장이 눈에 들어오는 글들을 읽고 싶었다. 그 문장에 취해서, 잠시 다른 생각들을 잊고 싶었다. 무슨 생각이 지금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마음이 소란했다. 소란한 마음을 다 버리고 떠나고 싶었지만 나는 결국 방 안에 있고 내일 아침도 똑 같은 시간에 일어나 똑 같이 준비하고 똑 같이 출근하겠지. 지긋지긋하다 말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게 삶인 걸.
일요일에는 엉엉 울었다. 눈이 퉁퉁 부어서 하루종일 눈이 제 상태로 돌아오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울었다. 어쩌면 그때 울었던 여파가 지금도 남아 있을지 몰랐다. 어제도 여전히 입맛은 없었고, 오늘도 그다지 입맛은 없었다. 예전엔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입맛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 적당한 불편함을 즐길 마음은 없었다. 뭐든 맘껏 먹고 싶어지는 편안한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속도 모르고 투명하게 밝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나는 밝을 자신이 없었고 그렇다고 우울하게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아니, 그냥 아무 말도 건네고 싶지 않았다. 속도 모르는 그 반응들을 보고 싶지 않았다. 요즘은 뭐든 회피하고 싶은가 보다. 회피하면 굳이 감정을 쓸 필요가 없잖아. 회사에서는 회피하고 싶은 일들도 해냈다. 전화번호를 찾고 전화를 걸고, 말을 고르고 문제를 해결하려 애썼다. 회피할 수 없으니까, 회피하지 않고 해냈다. 그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나를 지치게 했다. 정말 별 것 아닌 일들이, 어쩌면 그거야말로 너무나 매뉴얼대로 하면 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말들을 고르고 말을 꺼내고 말을 듣고 결과를 얻어내는 과정에서 나는 지쳤다. 그 일들의 연속이자 연속이자 연속인 일을 하면서 살 수 있겠냐고,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못할 건 없다고 생각했다. 회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어떻게든 해낼 것이다. 못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잘 알면서도 그 안에서 에너지를 쏙 빼가고 살겠지, 생각했다. 그렇다고 혼자 일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지겨웠다, 뭐가 그렇게 지겨운지도 모르면서 지겹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