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8 건강한 맛을 찾아서
행복을 자각하는 순간들을 중간중간 끼워 넣는 재미로 살고 있는 시험 기간. 보통에야 사람을 만나는 순간들에서 행복을 찾지만, 사람들과 딱히 말할 시간이 길지 않은 시험 기간엔 혼자서 재미있는 무엇인가를 할 궁리를 하는 과정에서 행복을 찾는다. 예를 들면, 지금처럼 도서관 밖 휴식 공간에 앉아서 글을 쓴다든지. 사실 이 가운데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려면 거쳐야 하는 장소라서, 아는 사람을 만날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생각했지만 만나면 또 뭐 어떤가 생각했다.
이번 시험 기간의 구세주는 명백하게 강이채다. 강이채의 앨범이 없었다면 이번 시험 기간은 너무나 우울했을 거야. 사실 너무 힘들어서 무슨 글을 써야 할지 잘 감이 안 온다. 한국어가 분명함에도 이게 한국어가 맞나, 싶은 글들을 읽고 있다. 그래도 이번 학기에 유일하게 기대를 품었던 게 문화학이었는데, 물론 재미있는 건 사실이나 원문을 읽고 있다 보면 이게 무슨 소리일까, 라는 생각을 내내 하게 된다. 아도르노의 책을 읽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책을 쓸 수 있지, 어떻게 이렇게 한국어가 한국어 같지 않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험 기간에는 원래 1차원적인 생각밖에 못한다. 힘들다, 그만하고 싶다, 이걸 왜 해야 하는 것인가, 도대체 언제쯤 끝날 것인가. 이런 일차원적인 생각의 연속인데 어떻게 깊이가 있는 글을 쓸 수 있겠어. 오늘의 짧은 서촌 나들이가 거의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겨우 2시간 정도 지났을 뿐인데. 서촌까지 가서 저녁 한 끼를 해결하고 오겠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갑자기 건강한 맛이 너무너무 먹고 싶어졌다. 기숙사 살면서 내내 자극적인 맛만 먹었던 것 같아서. 짜고, 달고, 그런 맛들. 사실 너무 심심한 맛들만 먹다 보면 갑자기 불닭볶음면이 먹고 싶어지고, 자극적인 맛들을 먹고 싶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요즘은 자극적인 맛들을 자꾸만 먹어서 그런 것인지 건강한 맛이 먹고 싶었다. 담백한 맛. 리틀포레스트에서 혜원은 배가 고파서 집에 돌아왔다고 말했고, 오늘 서촌을 가면서 나 역시 같은 이유로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편의점 김밥으로 점심을 때우고, 김밥이 아니면 파리바게트 빵으로 점심을 때우고, 대충 두유를 먹고, 아니면 편의점 샌드위치를 먹는 그런 점심들. 그렇게 점심을 간단하게 때우고 나서, 저녁은 나가서 먹곤 했는데 그 며칠이 이어지자 갑작스럽게 담백한 맛, 건강한 맛을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집을 떠나 이렇게 사는 생활을 한지도 꽤 되었는데, 집밥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처음이었다. 집에 가고 싶었고, 외로움이 없도록 채워주는 사람들이 있기를 바랐던 적은 많았지만 집밥 먹고 싶다, 생각한 건 처음이었다. 대단한 밥상 말고, 그냥 된장찌개만 있는 밥상이어도 좋으니 집밥이 먹고 싶었다. 과일이 먹고 싶은 걸까, 생각하기도 했다. 샐러드를 먹어야 하나 생각했지만, 샐러드를 먹으면 금방 배고파지는 관계로 샐러드를 먹으면 밤을 책임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 보기를 건너 뛰었다.
그리고 갑자기 떠오른 게 서촌이었다. 학교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도망치듯 가는 곳이 서촌이었으니까. 몇 정거장 되지 않는 거리에 있었고, 갈 때마다 행복해져서 돌아올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머릿속에서 서촌을 그리다, 떠오른 건 예전에 가고 싶었던 가락국수를 파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한국의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너무나 어울리는 인테리어와 막걸리를 팔고 있는 것을 보면서 언젠가 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문득 건강한 맛을 생각하다가 그 가게가 생각나서, 그 가게를 검색해 보았더니 조미료를 치지 않고 심심한 맛이라고. 싱겁다고 말하는 손님들도 있는데, 주인 분이 조미료를 쓰지 않는 요리 방식을 고수하고 계신다는 평이 있었다. 아, 오늘 가야 할 곳은 여기이구나. 갑자기 그 가게를 가서 먹을 생각을 하자마자 행복 회로가 가동되더니 너무너무 행복해져서 신나는 마음으로 서촌을 다녀 왔다. 늘 서촌을 갈 때면 경찰청, 경복궁역 쪽에서 내렸었는데, 지도에서 가는 길을 찾아보았더니 사직단에서 내려서 걸어가라고 하더라. 사직단에서 내려 지도를 따라 갔더니, 또다른 작은 가게들과 오래된 가게들, 작은 골목들이 나왔다. 어디를 가든 괜찮을 것 같은 가게들의 연속에, ‘아, 이래야 내가 사랑하는 동네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순식간에 행복해졌다. 그렇게 거쳐 도착한 가락국수 가게는, 정말 내가 원했던 맛 그대로였다. 배고파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심심한데 맛있었고, 따뜻했다. 무엇인가를 먹으면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순간들이 가끔 있는데, 예전에 히메지에서 따뜻한 카레와 돈까스를 먹을 때가 그랬고 오늘 가락 국수에 단무지를 얹어서 후루룩 먹는 순간이 그랬다.
너무너무 따뜻하고 맛있어서, 다 먹고 나서 너무 맛있게 먹었다고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지만 또 그런 부가적인 말을 붙이는 것은 부끄러워, 기분 좋게 인사를 하고 나오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날씨도 너무나 좋았고, 마음 같아서는 오래오래 산책하고 싶어졌지만, 그랬다가는 당장 내일의 시험이 망할 가능성이 다분했기 때문에 원래 계획했던 것만 하고 왔다. 따뜻하고 심심한 가락국수를 먹고, 내일 시험 보기 전에 먹을 치아바타를 사러 갔다. 치아바타를 잘 만드는 빵집에서 만든 치아바타도 너무나 먹고 싶었거든. 내가 사랑하는 담백함의 정석. 치아바타 만나고 빵을 좋아하는 삶 시작되었다! 할 정도로, 빵을 좋아하지 않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 빵집을 자주 들락날락하는 사람이 되었다. 빵을 좋아해서인지 빵이 간편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빵을 달고 사는 편에 가깝지 뭐. 빵집에서 빵 고르는 순간은 또 소소한 행복 중 하나이기도 하니까. 이미 알고 있었던 빵집에 딱 가서, 딱 치아바타를 사서 나와서 알고 있는 위치의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버스를 타고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익숙한 동네가 있다는 건 또다른 기쁨이 되는구나 생각했다.
이렇게 일기를 쓰면 두 장짜리 글을 후딱 쓰는데, 보고서를 쓸 때는 두 장이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지나. 사실 요즘엔 두 장 정도의 보고서는 하도 많이 써서, 두 장까지는 금방 쓰는데 3장부터는 글을 쓰기가 싫어진다. 그건 또 시험 이후의 일이니까, 그건 또 그때의 내가 하겠지. 그래도 일기를 쓰고 나니까 아까의 따뜻한 기억도 다시 떠오르고 다시금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기분을 회복한 기분이다. 아도르노랑 다시 가서 친해져 봐야지, 벤야민이랑도.